"경기동부 배후 민혁당 조직이 민노당 장악했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의 4.11 총선출마 포기 과정에서 실체가 드러난 ‘경기동부연합’이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의 산하 조직이란 주장에 이어 2000년대 초 이들이 당시 민주노동당 장악 시도를 했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과거 지하혁명조직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허현준 남북청년행동 사무처장은 “민혁당 산하 지하혁명조직 중 일부가 2000년 이후 전국 대학은 물론 민노당을 장악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과거 지하혁명조직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는 허현준 남북청년행동 사무처장은 “민혁당 산하 지하혁명조직 중 일부가 2000년 이후 전국 대학은 물론 민노당을 장악한 사실이 있다”고 밝혔다.
민혁당 내 지역조직 중 하나인 전북위원회 산하 ‘반미구국학생동맹’ 소속이던 허 사무처장은 88학번으로 전북대학교 총학생회장 출신이다. 그가 속한 지하혁명조직은 북한 김일성 주체사상을 혁명투쟁의 지도사상으로 받드는 주사파였다.
허 사무처장은 “민혁당의 지하혁명조직은 전국적, 부문별로 세분화돼 있었고 상당히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다”며 “이들이 민노당의 각 지구당 위원장 선출 때 집단으로 몇 차례씩 거주지를 옮겨가며 자신들의 세력 출신 위원장을 뽑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하루에 수십명씩 되는 당원들이 전국의 각 지역구에 집단적으로 가입했다가 위원장 선거 이후 밀물처럼 빠져나가서 다시 다른 지역구에 가입하는 식으로 사실상 민노당을 장악해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지하혁명조직의 일원으로서 민노당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하다가 지금까지 통합진보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인사 여러명을 알고 있다. 이들이 아직도 요직에 있다는 것은 지하혁명조직을 탈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허 사무처장은 “현재 거론되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들이 현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고 설명했다.
“민혁당 산하 지역조직 가운데 경기남부위원회는 당시 수원과 성남을 근거지로 한 경기도 동남부 지역을 망라하며 다른 조직에 비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2000년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일례로 2002년 무렵 전북대학교에 이 위원회 출신 인사가 와서 주사파 조직을 만들었다”며 “당시 27세로 1학년에 입학한 이 조직원은 이미 다른 대학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해온 골수 인사였던 것으로 파악됐다”고도 했다. 이 때 허 사무처장은 이미 전향한 이후이긴 했지만 총학생회장으로서 몸담았던 모교의 일이기에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허 사무처장은 “1990년대 중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에는 실제로 여러 차례 경기남부위원회 출신 간부들을 만난 일도 있었고, 이들이 여타 조직보다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경기동부연합이란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재야단체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이미 그 실체가 잘 드러나 있다는 것. 그런 만큼 지금 통진당 이정희 대표와 관련해 회자되는 경기동부연합은 민혁당 산하 경기동부위원회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허 사무처장은 “경기남부위원회 등 지하혁명조직과 관련해선 여러 정황을 근거로 하는 추측만 나오는 이유는 최대 지하혁명조직인 민혁당이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 데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조직원들 모두가 가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령 ‘민혁당 대부’로 불리는 김영환 중앙위원장(총책 겸 조직책, 선전책)의 경우에도 같은 당 중앙지도부 소속이던 하영옥 중앙위원(조직책)의 조직 구성원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지하혁명조직원들은 상부 조직에 대해 전혀 몰랐다.
허 사무처장은 “나름 상부조직에 가담했었지만 당시에는 북한 대외연락부와 맞닿아 있는 민혁당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산하 조직원이라도 민혁당 자체 조직원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조직 체계였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는 1980년대 이후 탄생했다고 보면 된다. 이전 운동권에도 북한에 대한 신봉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사회주의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해 김영환의 등장이 주사파를 가동시켰다.
김영환은 직접 북한에 넘어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지령을 받은 뒤 다시 남으로 내려와 민혁당을 만들고 주사파를 주창했다. 독자적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수용해 운동권 내 확산시켰다고 해서 ‘자생 주사파’로도 불리지만 북한을 혁명의 우군으로 간주하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사파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3대 노선을 내건 NL(민족해방) 이론을 만들어냈다. “NL 이론은 군부독재를 척결해 민주화를 이루고, 민족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분단의 원흉인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였으므로 사실상 반미주의였다”고 허 사무처장은 설명했다.
사실 반미주의는 70~80년대 넘어오면서 안병직 교수 등 남한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제기한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당시 PD(민중 민주) 계열로 불리던 사회주의자들이 ‘북한은 우리를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비해서 NL 계열은 달랐다.
지하혁명조직의 세력 확장 전술 역시 상당히 치밀했다고 한다. 당시 조직 내에서 ‘대중사업’으로 불리던 교육과 학습, 양성 역할을 맡았던 허 사무처장은 “조직원들은 5.18 민주화운동, 노동자 문제에 이어 주체사상 이론으로 옮아가는 단계별 학습을 받으면서 시위에 참여해 열의를 다져가는 방식으로 교육받았다”며 “주체사상으로 들어가면 김일성 회고록, 동영상 등을 통해 우상화 학습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조직원 모두가 이런 내용을 사실로 믿고 존경심을 표할 정도였으니 김일성에 대해 일상적으로 ‘장군님’ 호칭을 사용했으며, 묵념으로 시작되는 비공개 조직 모임에서도 ‘장군님 영도에 따라’라는 구절을 되새겼다”는 것이다.
“새 조직원이 가입할 때에도 ‘김일성 수령의 영도에 따르겠다’는 선서를 한 것은 물론이다.”
허 사무처장이 전향하게 된 계기는 민혁당의 창시자이지 전북위원회를 이끌던 김영환 씨의 전향과 관련이 깊다. 김 씨는 북한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자신은 물론 이끌던 전북위원회 전체를 전향시켰다. 하지만 2인자로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를 이끌던 하영옥 씨는 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민혁당 사건은 1990년대 중후반 무렵 김영환이 지하조직의 해체를 주장하며 전향하자 이 때문에 간첩 원진우(남한인 주민증 위조한 이름, 검열간첩)가 남파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하영옥과 만난 뒤 돌아가던 원진우가 탄 잠수정이 발각되면서 끝내 여수 앞바다에서 격침됐고, 하영옥과 접속한 내용이 적힌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잠수정 격파 전 윤택림의 남파 사실은 안기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 경기동부의 실체를 놓고 좌파 진영에선 ‘색깔론 공세’라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허 사무처장은 “이번 통진당의 행태는 과거 지하혁명조직의 판박이”라는 평을 내놨다. “과거 지역구위원장 부정투표를 보듯이 조직에 이익이 된다면 부정행위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에게는 조직 내부를 드러내는 일만큼 위험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이번 논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는 좌파 내부의 목소리조차 외면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허 사무처장은 “아직까지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연계되는 친북 지하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외에도 이제 이들이 정치사회권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굳이 친북·종북을 구분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단순한 좌파 세력과 달리 김일성을 추앙하고 그 일가의 세습을 인정하는 모든 세력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허 사무처장은 “민혁당의 지하혁명조직은 전국적, 부문별로 세분화돼 있었고 상당히 조직적인 활동을 펼쳤다”며 “이들이 민노당의 각 지구당 위원장 선출 때 집단으로 몇 차례씩 거주지를 옮겨가며 자신들의 세력 출신 위원장을 뽑았던 사실을 알고 있다”고 했다.
“하루에 수십명씩 되는 당원들이 전국의 각 지역구에 집단적으로 가입했다가 위원장 선거 이후 밀물처럼 빠져나가서 다시 다른 지역구에 가입하는 식으로 사실상 민노당을 장악해나갔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지하혁명조직의 일원으로서 민노당에 가입해 간부로 활동하다가 지금까지 통합진보당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인사 여러명을 알고 있다. 이들이 아직도 요직에 있다는 것은 지하혁명조직을 탈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허 사무처장은 “현재 거론되는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이름이 사실상 민혁당 산하 경기남부위원회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들이 현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전혀 근거가 없지 않다”고 설명했다.
“민혁당 산하 지역조직 가운데 경기남부위원회는 당시 수원과 성남을 근거지로 한 경기도 동남부 지역을 망라하며 다른 조직에 비해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2000년 이후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그는 “일례로 2002년 무렵 전북대학교에 이 위원회 출신 인사가 와서 주사파 조직을 만들었다”며 “당시 27세로 1학년에 입학한 이 조직원은 이미 다른 대학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학생운동에 가담해온 골수 인사였던 것으로 파악됐다”고도 했다. 이 때 허 사무처장은 이미 전향한 이후이긴 했지만 총학생회장으로서 몸담았던 모교의 일이기에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허 사무처장은 “1990년대 중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할 때에는 실제로 여러 차례 경기남부위원회 출신 간부들을 만난 일도 있었고, 이들이 여타 조직보다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과거 운동권 출신 인사들에 따르면, 경기동부연합이란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던 재야단체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이 단체는 이미 그 실체가 잘 드러나 있다는 것. 그런 만큼 지금 통진당 이정희 대표와 관련해 회자되는 경기동부연합은 민혁당 산하 경기동부위원회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허 사무처장은 “경기남부위원회 등 지하혁명조직과 관련해선 여러 정황을 근거로 하는 추측만 나오는 이유는 최대 지하혁명조직인 민혁당이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 데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조직원들 모두가 가명을 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가령 ‘민혁당 대부’로 불리는 김영환 중앙위원장(총책 겸 조직책, 선전책)의 경우에도 같은 당 중앙지도부 소속이던 하영옥 중앙위원(조직책)의 조직 구성원에 대해선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지하혁명조직원들은 상부 조직에 대해 전혀 몰랐다.
허 사무처장은 “나름 상부조직에 가담했었지만 당시에는 북한 대외연락부와 맞닿아 있는 민혁당에 대해 전혀 몰랐다”며 “산하 조직원이라도 민혁당 자체 조직원이 아니면 모를 수밖에 없는 조직 체계였기 때문”이라고 부연했다.
우리 사회에서 주사파는 1980년대 이후 탄생했다고 보면 된다. 이전 운동권에도 북한에 대한 신봉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사회주의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해 김영환의 등장이 주사파를 가동시켰다.
김영환은 직접 북한에 넘어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지령을 받은 뒤 다시 남으로 내려와 민혁당을 만들고 주사파를 주창했다. 독자적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수용해 운동권 내 확산시켰다고 해서 ‘자생 주사파’로도 불리지만 북한을 혁명의 우군으로 간주하고 이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사파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3대 노선을 내건 NL(민족해방) 이론을 만들어냈다. “NL 이론은 군부독재를 척결해 민주화를 이루고, 민족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라도 우선적으로 분단의 원흉인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리였으므로 사실상 반미주의였다”고 허 사무처장은 설명했다.
사실 반미주의는 70~80년대 넘어오면서 안병직 교수 등 남한의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제기한 이론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당시 PD(민중 민주) 계열로 불리던 사회주의자들이 ‘북한은 우리를 통일전선의 대상으로 볼 뿐’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비해서 NL 계열은 달랐다.
지하혁명조직의 세력 확장 전술 역시 상당히 치밀했다고 한다. 당시 조직 내에서 ‘대중사업’으로 불리던 교육과 학습, 양성 역할을 맡았던 허 사무처장은 “조직원들은 5.18 민주화운동, 노동자 문제에 이어 주체사상 이론으로 옮아가는 단계별 학습을 받으면서 시위에 참여해 열의를 다져가는 방식으로 교육받았다”며 “주체사상으로 들어가면 김일성 회고록, 동영상 등을 통해 우상화 학습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조직원 모두가 이런 내용을 사실로 믿고 존경심을 표할 정도였으니 김일성에 대해 일상적으로 ‘장군님’ 호칭을 사용했으며, 묵념으로 시작되는 비공개 조직 모임에서도 ‘장군님 영도에 따라’라는 구절을 되새겼다”는 것이다.
“새 조직원이 가입할 때에도 ‘김일성 수령의 영도에 따르겠다’는 선서를 한 것은 물론이다.”
허 사무처장이 전향하게 된 계기는 민혁당의 창시자이지 전북위원회를 이끌던 김영환 씨의 전향과 관련이 깊다. 김 씨는 북한에 대한 회의를 느끼면서 자신은 물론 이끌던 전북위원회 전체를 전향시켰다. 하지만 2인자로 경기남부위원회와 영남위원회를 이끌던 하영옥 씨는 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민혁당 사건은 1990년대 중후반 무렵 김영환이 지하조직의 해체를 주장하며 전향하자 이 때문에 간첩 원진우(남한인 주민증 위조한 이름, 검열간첩)가 남파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하영옥과 만난 뒤 돌아가던 원진우가 탄 잠수정이 발각되면서 끝내 여수 앞바다에서 격침됐고, 하영옥과 접속한 내용이 적힌 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잠수정 격파 전 윤택림의 남파 사실은 안기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지금 경기동부의 실체를 놓고 좌파 진영에선 ‘색깔론 공세’라며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허 사무처장은 “이번 통진당의 행태는 과거 지하혁명조직의 판박이”라는 평을 내놨다. “과거 지역구위원장 부정투표를 보듯이 조직에 이익이 된다면 부정행위도 서슴치 않는다”는 것이다. 더불어 “이들에게는 조직 내부를 드러내는 일만큼 위험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이번 논란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는 좌파 내부의 목소리조차 외면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허 사무처장은 “아직까지도 북한의 지령을 받고 연계되는 친북 지하세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 외에도 이제 이들이 정치사회권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어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굳이 친북·종북을 구분해야 할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단순한 좌파 세력과 달리 김일성을 추앙하고 그 일가의 세습을 인정하는 모든 세력은 비난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